우리들의 인권 이야기: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상영작
주민등록증을 찢어라!ㅣ이마리오ㅣ45분49초ㅣ2001ㅣ다큐멘터리
일시 : 2021. 05. 29 (토) 14시
모더레이터 : 지역창작자 조남현
녹취 : 사회적협동조합 인디하우스
장소 : 사회적협동조합 인디하우스
조남현(모더레이터) 인디하우스의 조합원이자 지역에서 영상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남현이라고 합니다. 오늘 보신 영화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200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요. 이 영화를 연출하신 이마리오 감독님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2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이 자리를 통해 다시금 관객분들과 만나게 되었는데요.(웃음) 어떠신가요? 이마리오 영화를 정말 오랜만에 봤어요, 민망하네요.(웃음) 특히<주민등록증을 찢어라!> 같은 경우에는 진짜 잘 안 봐요. 제가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게 진짜 어색하고 저의 이상한 내레이션이나.. 그때는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 나이 들어서 다시 보니 정말 패기 넘쳤구나 싶기도 해요. 20년이 지난 지금도 사실 주민등록 제도와 관련된 부분은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한편으로는 굉장히 안타깝기도 해요. 조남현(모더레이터) 영화를 보면서 제가 처음 주민등록증을 만들던 그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어요. 사실 저는 주민등록증을 만들면서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영화를 보면 김기중 변호사님이 엄지손가락을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돌려 찍는 경험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굴욕적인 일인데, 대부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꼬집어 낸 지점도 있었죠. 대부분은 저처럼 기억조차 못 하시거나 혹은 기억하더라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실 텐데, 감독님은 그 당시에 어떻게 지문날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셨고 공동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영화를 만들기 위해 결합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마리오 91년도에 우연히 시위 현장을 갔다가 떨어져 있는 유인물을 보았는데 그게 주민등록증 지문날인 제도에 반대하는 거였어요. 그때부터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면서 이런 활동들에 촬영이 아니더라도 많이 참여하면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다큐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했고 처음에는 제가 주인공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섭외하려고 했는데 섭외가 잘 안됐어요.(웃음) 근데 그때 제가 무면허로 스쿠터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그게 걸려서 파출소에 끌려갔어요. 그러면서 열 손가락 지문을 찍었는데 이걸 계기로 제가 주인공으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체적인 이야기를 짤 수 있었어요. 조남현(모더레이터)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 오토바이를 왜 타신 건가요?(웃음) 이마리오 예전에 대학 다닐 때 면허 없이 스쿠터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그냥 탄 거죠. 아무 생각 없이.(웃음) 그리고 그때만 해도 스쿠터를 타려면 면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타게 된 겁니다.(웃음) 조남현(모더레이터) 영화의 도입부가 처음부터 지문 날인의 정당성을 국가와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 제도에 대해 찬성하고 반대하는 시민들의 의견이 대립되면서 시작해요. 감독님의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민감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시는데, 그때마다 의문을 가지는 이들은 항상 존재하고 이들과 건강한 대화가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사실 같은 시민에 의해서 시위의 장이 훼방 놓아지기도 하고 혹은 영화 속에서 나온 것처럼 약속 자체가 무산이 되거나 대화가 비틀리는 경우도 있죠. 특히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작업을 하시다 보니 이런 경우가 많으셨을 것 같아요. 이럴 때마다 불쾌함이나 무력함 또는 분노를 느꼈을 것 같아요. 이것들을 이겨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마리오 영화를 보면 분노가 느껴지죠.(웃음) 못 찍게 하니까 촬영감독이랑 미리 이야기를 하고 사실 몰래카메라를 썼어요. 롤이 돌면 빨간불이 들어오니까 그걸 가리고 그냥 들이밀었어요.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촬영감독이랑 굉장히 많이 싸우면서 진행했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도 한 편으로 과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근데 일단 열 손가락을 찍는 행위는 10대 강력 범죄 한에서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이외의 범죄에서는 찍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경찰들도 습관처럼 열 손가락 지문을 요구하죠. 저는 지문날인 거부자로 주민등록증이 없고 전산망에 제 정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사 중 지문날인 요구를 받았죠. 그러면서 이 다큐를 시작했고 저 때는 30대 초반이라 패기 넘치기도 해서 그냥 덤벼들었죠. 지금이라면 미리 절차를 다 밟고 공손하게 진행했을 텐데(웃음) 그냥 들이받았어요. 특히 방송사면 행정기관에서도 협조를 잘해주지만 기본적으로 방송사가 아닌 경우에는 카메라를 들이밀지 못하게 해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설득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지금도 그 태도들이 바뀐 것 같진 않아요. 이건 방법이 없는 것 같고 들이받아야죠, 뭐.
조남현(모더레이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플라스틱 주민등록증 카드가 없으신가요? 이마리오 네, 없습니다. 조남현(모더레이터) 그러면 여전히 전산망에는 없으신 건가요? 이마리오 확인은 못 해봤는데요, 2000년도 초반에 모든 행정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전산 통합이 되고 전자정부법이 시행됩니다. 그게 주민등록번호만 치면 모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거죠. 동사무소 가서 이름이 아니라 민증 번호를 치면 정보가 싹 떠요. 그리고 최근에 보니까 저에 대한 전산 정보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2010년까지만 해도 제가 전산망에 없어서 당황하면 지문날인 거부자라고 설명하고 발급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옛날 정보를 가지고 그걸 전산화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남현(모더레이터) 영화를 보고 궁금해서 알아보니 두 번의 헌법소원(헌법정신에 위배된 법률에 의해 기본권의 침해를 받은 사람이 직접 헌법재판소에 구제를 청구하는 일.)을 하셨는데 두 번 다 지문날인은 헌법에 합당한 것이라는 결론이 6:3의 비율로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이런 제도에 저항하면 받게 될 불이익이 크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가져도 행동하기 어려운 시기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 이야기를 오늘 날로 가져왔을 때 최근에 K-방역처럼 국가가 확진자의 동선이나 접촉자를 찾아내는 게 무서울 정도로 빠른데요. 당시 지문등록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신 것처럼 오늘날에 저희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할 지점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이마리오 K-방역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면 유럽 쪽에서는 한국이 이렇게 방역이 잘 된 이유는 쉽게 이야기하면 국민들이 통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을 했어요. 이 기사를 보면서 한 편으로 반은 맞고 반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자발적으로 한 것인데 이것이 길들여졌기에 자발적인으로 한 행동이냐 아니냐는 다른 결로 해석해야 할 것 같고요. 카톡 QR 같은 건 좀 애매해요. 핸드폰 GPS로 제 위치 파악을 하고 그게 보건복지부 전산망으로 들어가는데 그걸 제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부분을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한국은 선택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선택하지 않아도 피해 가는 게 없고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가는 게 되어야 하는데, 한국은 선택하지 않으면 피해를 주기 때문에 문제인 것 같아요. 저같이 민증 없어도 20년 동안 잘 살고 큐알이 싫으면 수기로 작성하는 게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예를 들어 어느 곳에서는 일괄적으로 수기 작성 안된다거나 하는 건 어떻게 보면 굉장한 폭력이죠. 편리성을 위해서 나의 모든 정보를 줄 것이냐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를 줘야 하는데 반강제로 가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조남현(모더레이터) 최근에 카카오톡 민간인 사찰이 이슈가 되면서 텔레그램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주목되고 온라인 망명도 많이 갔죠. 그리고 그 텔레그램이라는 공간 안에서 N번방이라는 범죄가 발생했고 텔레그램 측에서 범죄자들의 개인 정보를 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우리의 이목이 많이 집중되기도 했어요. 이것처럼 분명한 순기능과 부당함이 공존하는 지점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해요. 이것처럼 오늘날의 문제의식은 여전하고 이런 점들과도 맞닿아 있는 영화라고 느껴져서 저는 영화를 굉장히 재밌고 생생하게 봤어요. 혹시 관객분들 질문 있으실까요?
관객 1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정보를 찾기 더 어려웠을 것 같고, 이동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다양한 지역을 촬영하여 소스를 만들고, 그 외에 대학교에 찾아가 자문을 구하거나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필요한 자료들을 발품 팔아 모으셨는데 그럼 프리프로덕션(영화를 찍기 전 계획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단계) 과정이 굉장히 길었을 것 같아요. 그런 프리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이마리오라는 다큐 감독을 한 축으로 각 지역에서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연합체들이 하나로 모인 느낌이 들어서 영화에서 연대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지금 시기의 다큐 현장은 과거에 비해 연대가 약해진 느낌인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마리오 98년쯤부터 지문날인 반대 단체에서 같이 활동하고 책도 보면서 정보를 많이 얻었고, 처음부터 작품을 찍을 생각은 없었어요. 작품을 찍기로 결심하고 관련 단체에 메일을 쫙 보냈어요. 이런 다큐를 찍을 예정인데 출연할 사람을 모집하니 연락 달라고. 찾은 사람은 얼마 없었어요, 그런 식으로는 한두 명 정도 섭외가 됐고 대부분은 서울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알게 되신 분들을 자연스럽게 촬영했어요. 그리고 그 시절에 다양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조명이랑 카메라 바리바리 챙겨서 3,4명이 대중교통 이용해서 광주나 어디든 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전국에 인권 영화제가 많이 있을 때라 상영도 많이 되었어요. 그때 제 조건은 상영료 안 줘도 되지만 관객과의 대화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 조건으로 당시 한 4,50 군데를 다녔어요.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영화 활동과 동시에 단체 활동도 같이 하는 취지로 움직였습니다. 당시 관객분을 대략 3,000분 정도 만났어요. 어찌 보면 다큐를 만든 사람이면서 활동가의 성격도 스스로에게 굉장히 강했어요. 지금 시대의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요즘에 임팩트 프로듀서의 영역이 존재하고 예전에 비해서 관객과 만나는 방식이 다양해 보이긴 하지만 결속력이나 힘은 확실히 떨어진 것 같긴 해요. 사회 이슈를 다루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지역 인권 영화제가 없어지면서 사라지기도 했고, 코로나 이후로 대면으로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드물어지다 보니까 상영을 통해서 영화 자체가 가질 수 있는 힘은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관객 2 저는 동네나 길거리에서 마리오 감독님을 자주 뵀는데, 따뜻한 다큐 만드시는 분인 줄 알았어요.(웃음) 저도 주민등록증 제도나 지문날인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반대하기는 했는데, 사실 지금도 출퇴근할 때 저희는 지문으로 출석을 하거든요. 하기 싫다고 말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님은 20년 전에 얼굴을 공개하시고 기관도 다니면서 영상으로 남겨질 때 두려움은 없으셨나요? 이마리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다큐를 시작할 때 한국 사회와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에 발언을 하고 싶었어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영화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다큐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에 더 가까웠고 활동이자 영화를 만드는 행위를 한 거고요. 그래서 고소나 고발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은 나이를 먹다 보니 그때에 비해 이런저런 걱정이나 겁도 좀 많아지고 보는 시야도 확실히 더 넓어진 것 같기도 해요. 저 때는 경주마처럼 하나만 보고 달렸는데. (웃음) 조남현(모더레이터) 이 작업 이후에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이야기,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대한 이야기, 대선 국정원 개입 의혹에 대해 다룬 영화들을 연출해 오셨는데요. 다 주제가 다르지만 이 영화들의 맥락은 비슷하다고 느껴져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믿음이나 외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꼬집어 주는 역할을 하시는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 작가로 감독님의 시선이 머무르게 되는 지점이나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는 어떤 것인가요? 이마리오 2010년 이후에는 그나마 언론들이 사회에서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그 이전만 해도 2000년도 초반까지 언론은 굉장히 편향되어 있었어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임에도 언론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그런 소재들 위주로 다큐멘터리 제작이 많이 이루어졌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것들 중에서도 사람들이 잘 다루지 않는, 관심은 있지만 다루기는 어려운 것들 위주로 제작을 했고요. 그게 <미친 시간>이나 <더 블랙>에 해당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특별한 기준이 있다기보단 살다 보면 그때그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어떤 이야기들은 그냥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가지고 있기도 하잖아요, 그게 더 가다 보면 다큐를 만들어야겠다 생각이 드는 게 있는 거죠. 저의 관심이 계속 가고 이걸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야겠고 최소한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작업하는 것 같아요. 조남현(모더레이터)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포지션이 역사적으로 피해자에 위치하게 되는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사실 우리가 반대로 행했던 역사도 많았고, 광주 같은 국가 폭력에 의한 역사는 그때 그 시절에 종결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부분들을 계속해서 꺼내주시는 것 같아요. 영화 중반부에서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들을 잘 모아서 굉장히 재미있게 만드셨는데, 감독님 다른 작품 중에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라는 단편도 생각이 나더라고요. 서로 다른 소스들을 잘 모아서 하나하나 다 듣고 적어보지 않으면 어려운 작업이라고 느껴지는데 완성본이 굉장히 재밌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여러 소스들을 조각내어 작업하실 때의 노하우나 작업 중 쾌감 같은 게 있나요?
이마리오 쾌감 있죠.(웃음)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 같은 경우에는 이명박 시대 때 라디오 방송을 계속했는데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마침 짧은 영상을 하나 만들어야 했고 라디오의 대본 같은 건 다 나와있었기 때문에 그걸 다운로드해서 재편집하면서 이명박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어서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게 말이 되게 만들어지는 순간 묘한 쾌감은 확실히 있어요. < 더 블랙> 작업도 마찬가지로 김하영 국정원 요원의 노트북 포렌식이 중요한 사항이다 보니 경찰청 포렌식 룸에 카메라가 두 대가 설치가 되었기 때문에 분량이 꽤 됐죠. 한 일주일가량 녹취를 다 해야 했고 여기서 무엇을 써야 할지 정해야 해서 굉장히 힘들고 어렵지만 쾌감도 있습니다. 마치 탐정같이 맥락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다큐의 작업과 유사했습니다. 소스의 재배열과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은 어렵지만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조남현(모더레이터) 영화 속 배경은 주로 춘천과 서울이었는데, 지금은 강릉에서 살고 계시고 살고자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인디하우스의 터줏대감으로 계시기도 하고(웃음) 강릉이라는 지역에서 무언갈 해나가고자 하시는 이유가 있으실까요? 이마리오 서울에서 13년 정도 살면서 편한 느낌이 한순간도 느낀 적이 없었어요. 할 것도 많고 재밌고 정보도 많은데 한편으로는 제가 이 도시에서 사는 게 너무 안 어울리는 느낌이었고, 그러다가 좋은 핑계가 생겨서 2009년에 강릉으로 오게 되었고 강릉의 영화인들을 알게 되면서 인디하우스가 만들어진 거죠. 특별한 의도가 있다기보단 제가 서울에 적응을 못해서 떠나온 거고, 나이가 들수록 삶의 속도가 대도시는 어렵더라고요. 서울은 제가 저의 속도를 컨트롤할 수 없었고 그걸 거부하는 순간 튕겨져 나가게 되었는데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리고 강릉 같은 경우는 수요와 공급이 적기 때문에 그 희소성을 잘 살리면 지역의 장점을 강점으로 부각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조남현(모더레이터) 이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강릉으로 이주하기 이전인데 크레딧에 강릉씨네마떼끄가 눈에 띄었어요. 이 당시에 강릉씨네마떼끄와는 어떤 사이였나요? 이마리오 90년대 후반에 뉴스보이스란 이름으로 지역에서 청소년 대상으로 방학 때 제작 워크숍 비슷한 걸 했어요. 그때 강릉씨네마떼끄를 알게 되었고, 제가 이 작업을 하면서 후원을 받았어요. 그때 제작비가 모자라서 후원을 받았고 조건은 완성본을 후원자분들한테 VHS 파일을 복사해서 보내는 방식이었어요. 조남현(모더레이터) 감독님과 저의 첫 관계는 2009년에 강릉에 내려오시면서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였는데요.(웃음) 마쌤은 계속해서 지역에서 다큐멘터리 워크숍을 하고 계시고, 조심스럽긴 하지만 매번 다큐멘터리에 대한 호응도가 동시에 진행되는 극영화 워크숍에 비해 약하거나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마리오 저도 궁금해요.(웃음) 강릉뿐 아니라 다큐의 영역은 독립영화라는 틀 안에서 굉장히 적어요. 극영화도 어렵지만 다큐멘터리 장르의 특성상 작업을 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고, 순간순간 나를 직면하게 돼요. 이 작업을 하기에는 나의 정신적인 성숙도가 굉장히 얕은 거 아닌지, 나는 똑바로 살고 있는지 의심하는 이런 순간들을 굉장히 많이 깨닫고요. 근데 이걸 처음 마주치면 굉장히 힘들죠, 그 과정을 잘 넘어서기만 하면 되는데 쉽지 않은 일이에요. 다큐 하나 만드는데 내가 어떤 세상을 원하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연결되니까 그것들을 돌파하거나 우회해서 넘어가면 되는데 포기하는 경우가 계속 생기기 때문에 작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거죠. 확실한 거 하나는 한국에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의 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여기서 조금만 버티면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웃음) 조남현(모더레이터) 워크숍 교육 시 팀으로도 만들 수 있지만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실제로 혼자 한 사람당 하나의 작업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워크숍을 진행하시는데요. 감독님의 데뷔작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스텝이 되게 많았어요.(웃음) 첫 영화를 제작한 서울영상집단과 어떻게 만나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신 건가요? 이마리오 서울영상집단은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 단체고 91년도에 만들어졌죠. 서울영화집단이라고 예전에 서울대학교 얄라셩 출신들이 나와서 만든 독립영화의 초기 단체였고 91년도부터 다큐멘터리 전문 단체가 되었어요. 제가 서울을 간 게 96년도인데 다큐를 처음 알고 배우면서 찾아보다가 저의 성향과 가장 맞는 곳이 서울영상집단이라서 그곳에 들어갔어요. 활동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 영화의 스텝들은 대부분 서울영상집단의 회원분들이었어요. 제작비가 더 들어가거나 인건비를 주는 구조가 아니어서 그렇게 형성된 스텝이었고, 그때부터 기획 다큐멘터리 방식의 작업들을 배웠고 지금도 그런데 제가 만든 다큐에서 저 혼자 작업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촬영도 절대로 제가 안 하고, 잘 못 찍으니까.(웃음) 제작 규모나 제작비의 마련에 따라 맞춰서 하지만 저는 혼자 하지 않는 주의에요. 그래야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이 다큐를 이어서 하든 안 하든 그런 경험치를 쌓을 수 있고요. 조남현(모더레이터) 앞서 다큐 작업을 할 때 나를 마주하게 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스텝들과 함께 하다 보면 동료들에게 그런 부분이 드러나지 않으면 좋겠기에 타협할 것 같은데 누군가와 함께 하는 과정에서 방향들은 어떻게 잡아나가는지 궁금합니다. 이마리오 극영화와 다르게 다큐멘터리는 촬영 현장에 가면 연출자가 카메라를 드는 게 아니라 촬영감독이 따로 있다면 촬영감독이 이 작품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좋은 촬영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이런 게 기본적으로 전제가 되어야 하고, 따로 신을 찍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촬영감독이 알아서 찍는 거기 때문에 사전에 공유되는 게 크면 클수록 작품을 하기 훨씬 수월하겠죠. 그런 지점이 극영화와 가장 큰 차이이고 이것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촬영감독이 오더라도 촬영 자체가 진행이 안되죠. 아무튼 다큐멘터리 촬영 꼭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노매드랜드> 같은 작업들을 보면 다큐와 극영화의 경계선에 있는 작업들인데 이런 작업도 다큐를 통해 가능할 것 같고, 다큐멘터리 작업이 쌓이면 촬영으로 가도 극영화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잡는 데 있어서 굉장히 좋은 요소가 생성될 것 같아요. 관객 3 저는 영화를 알고 있던 시기는 길었는데 오늘 처음 봤고, 다큐를 만들면서 이마리오 감독님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요. 훌륭하신 분이랑 작업을 했다고 다시 한번 느꼈고, 장인 정신으로 만들면 시간이 지나도 빛을 발휘하는 것처럼 공들여서 만든 다큐멘터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주제로 그 시기에 이것을 완성하셨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시고 코로나 시대에서 요새 부딪히고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문제들을 마주치면서 많이 흘려보냈던 것 같아요. 그 순간의 불편함이나 문제의식을 가져도 그것을 지속하거나 작업으로 이어가기에는 세계가 단기간 안에 너무 빠르게 흔들리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안전과 공익의 목적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차등을 두고 통제의 규제로 사용하는 요즘 시대의 모습들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많이 떠올렸습니다. 당장의 편리함보다는 장기적인 것에 대한 생각도 하고 다큐멘터리 작업에 대한 저항 정신과 에너지를 늘 많이 받았고 이번 상영회를 통해서도 그 기운을 얻고 가는 것 같습니다. (박수)
관객 4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지점이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요.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공적 기관에서 말하는데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질은 뭘까가 궁금했고요. 마지막 장면에서 박정희 생가에서 분향소로 카메라의 시선이 옮겨져서 저는 좀 놀랐거든요, 이 마지막 장면의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마리오 삶의 질은 통계적으로 정책을 짜고 복지 정책의 예산을 관리하는 부분에서 편리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고요, 사실 그냥 갖다 붙인 거죠. 학생증이나 회사원증으로 이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게 맞는 거지 동네 주민임을 인증하는 신분증을 이용하는 건 이상한 거예요. 유럽이나 다른 나라는 정보 통합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고요. 정보 통합은 IT 강국이라 불리는 한국의 근원에 존재하는 이면이고 한국은 베타테스터라 불리는 테스터가 굉장히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국가인 거죠. 박정희 생가가 나온 이유는 자료 조사 중 유신시대 김신조 사건까지 파고 들었고 이상하게 제가 작업을 할 때 마지막에 걸리는 건 박정희었어요. 이 영화의 시작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촬영을 잘 못하긴 했지만 박정희로 마무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조남현(모더레이터) 네, 이제 마무리를 하려 하는데요. 현재는 지금까지 다루셨던 의제와는 좀 다른 작업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이것과 관련된 앞으로의 활동 계획과 오늘 자리하신 소감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마리오 명주동 동네의 작은 정원이라는 할머니들이 운영하시는 주민자치 모임이 있어요, 그분들에 대한 다큐를 지금 3년째 찍고 있고 올해 촬영이 끝나면 내년 여름쯤에 완성하려 합니다. 50살 전까지는 제 안에 분노가 많았는데 50살이 되면서 그 방향이 바뀌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앞으로 남은 내 삶이 행복해질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예전에는 조금 더 날이 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면 지금은 행복과 관련된 이야기들에 더 시선이 가게 되었고 이분들의 굉장히 특별하고 공동체로서의 노년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분들을 통해 내가 보고 싶고 지향하고 싶은 삶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싶고 내년쯤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남현(모더레이터) 네, <너나들이> 마지막 상영회에 자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Comments